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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생각] 살며 생각하며

망각의 축복

인간은 살아가며 끊임 없이 무언가를 기억하고, 또 잊어 간다. 그 기억의 조각은 적당히 미화되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게 된다.

1999년, 나는 판타지 소설을 열광적으로 읽어댔다.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조금씩 보기 시작하다가, 판타지 소설 매니아였던 친구와 2학년 때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. 몇 달 정도 닥치는 대로 읽다가 나는 흥미를 잃었고, 지금은 몇 편의 이야기 중 아주 일부만 기억한다.

그 중 하나가 '드래곤 라자'에서 망각의 축복에 관해 이야기 한 내용이다.
정확하게 언급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 발견한 책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. '인간은 다른 종족에 비해서 짧은 삶을 사는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'망각'이라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발전해 나갈 수 있다' 인간은 망각을 하기 때문에 힘든 과거조차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낙관적으로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. 이후에도 여러 판타지 소설에서 드래곤은 '망각의 축복'이 없기 때문에 슬픈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.

난, 기억력이 참 나쁘다. 망각의 축복을 과하게 받았지. 부끄러운 기억이나 슬펐던 일들을 잊는 것이야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내가 해야할 일 따위를 잊을 때는 참 답답하기 그지없다. 친구나 지인의 이름을 잊어서, 상대방과의 소중한 추억을 잊어서, 의미 있는 날을 잊어서 등등 내 보잘 것 없는 기억력 때문에 누군가에게 미안했던 적이 참 많다. 특히 실수나 실패가 학습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만 잊으니 내 기억력은 참 도움이 안 된다.

이렇게 한심한 기억력인데 왜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은,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일까. 정말이지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선택적 기억의 파편들이다.

그래도 이 편이 다행인가.
어느 기사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한 여성을 본 적이 있다. 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읽었었는데,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. 실제로 그런 일이 있을 수 있나?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데, 내가 제대로 된 기사를 본 건지 또다시 나의 기억력에 회의가 드는구나. 

그 기사가 사실이든 아니든, 만약 내가 지금과 반대로 대부분의 일을 기억하는 상황이 된다면 정말 괴로울 것 같다. 내 인생 최대의 목표는 아마도 '마인드 컨트롤'이 되겠지. 학자로서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지만 실연의 그늘에서 살아갈 위험도 있다. 난 꽤 감상적인 편인데, 그러한 감정 조절을 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.

그게 아니더라도 요즘의 나는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. 순간 떠오르는 기억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.